"장애학에서는 몸의 손상이 장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상과 상호작용하는 사회적 구조가 장애를 만든다고 말한다."
- 작가노트
김초엽은 작가노트에 이렇게 쓴다. '기술이 약속할 미래는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동시에 접근 불가능한가.' 기술은 언제나 편리성을 외치지만 편리성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기술을 가진 사람 뿐이다. 인터넷을 활용하지 못하는 노인들은 햄버거조차 그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먹을 수 있다. 위험함을 알리는 크락션, 신호등은 그것들을 보고 들을 수 없는 이들에게는 역설적으로 위험한 기술들이다.
"우리의 세계에서 성장한 정신은 성장한 신체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주 작은 몸집'으로 태어난 이브는 위험함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지식이 모여있는 격자 구조물인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 없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도 이브는 인지 공간에 반감을 가진다. 이브의 왜소한 몸집 때문에 또래 아이들은이브를 괴롭히고, 제나는 인지 공간에 들어가기만 하면, '공동 지식'을 통해 우리의 사소한 다름은 없어지기에 괴롭힘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브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포기할 수 없다며, 인지 공간 없이도 자신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브는 차이를 긍정한다. 이브는 인지공간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며, 제나에게 여러 차례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제나는 인지 공간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인지 공간의 편리성을 생각하며 이브의 말에 깊이 생각을 쏟지 않는다. 이브가 들짐승의 습격으로 죽고, 제나는 이브의 집에 찾아가 이브만의 인지 공간인 '스피어'를 만난다. 제나는 '인지 공간'의 관리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그것을 이루었지만, '인지 공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공동체의 미덕은 잊고 보내주는 것이었다."
"이브를 기억하기 위해서 나는 인지 공간을 떠나야 했다."
소설 속에서 '인지 공간'은 공동체의 인지 능력에 평균값에 수렴한다. 평균,공동,분배,정의,와 같은 것들은 그것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역설적으로 정반대의 것을 제공한다. 평균은 어떠한 값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이지, 값을 가지지 못한 즉 인지 공간에 들어가지 못한 이브에게는 불평등의 전제가 된다. 제나가 만든 자신만의 인지 공간인 스피어는 희망을 보여준다. 발전을 위한 공동지식으로써의 인지 공간이 아닌, 차이를 긍정하고 존재를 결정짓는 기억이나 생각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지 공간' 어디에도 이브의 스피어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다. 그것은 합리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인류 발전과 교육에 불필요하며, 혼란만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삶을 탄압하는 모순은 너무나 많은 글로써, 사상으로써, 문제 되어왔다. 동시에 우리는 모순적이게도 발전을 긍정해왔다. 편리성을 찾아 헤멨으며, 그것이 자신에게 편리하다면 타인에게도 편리할 것이라는 동질화된 생각으로 외면했다. 소설 속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우리는 같은 공간에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공간적 사고로 타인을 외면하며 편리함만을 발전시켰다. 인류가 발전했으니 개개인의 삶은 당연히 발전되었을 것이라는 전제로.
우리는 개인의 삶에 집중하려고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개인의 불행하고 절망적인 삶에 집중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는 불행과 절망이 없으며, 희망차고 밝은 기운만이 멤돈다. 우리는 그것들이 삶의 당연한 부분이라는 듯이, 당연히 이렇게 진보된 세상속에는 행복과 편리함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말한다. 그런 우리에게 장애는 불편한 것이며, 차이가 아니다. 장애는 A'가 아니라 B이며 우리는 B를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차이를 소비하며, 모든 소비가 그렇듯, 단편적으로 잠시 체험한다. 그러나 그것은 놀이기구를 타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그러한 경험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결과물은 시혜적인 태도와 사고이다. 장애는 기계와 같이 고쳐야하며, 불완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과거의 기술을 바라보며, 현실의 기술에 안도하고 감사히 여기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우리의 편리함 속에서 또 다른 우리는 배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