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영혜는 무엇인가를 죽이고, 피를 뒤집어쓰며, 다른 사람이 되어 입맛을 다신다. 영혜는 꿈을 계기로 채식을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기는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속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향유해야 하는 식문화이다. 신이 죽어버렸고,
건강이 새로이 여신이 된 사회에서 고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행위가 된다. 이는 처음만난 사회적 관계에서도 걱정과 교정의 대상이며, 조롱 나아가서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얼마 전에 오십만년 전 인간의 미라가 발견됐죠? 거기에도 수렵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육식은 본능이에요. 채식이란 본능을 거스르는 거죠.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 p31
"골고루, 못 먹는 것 없이 먹는 사람이 건강한 거 아니겠어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원만하다는 증거죠" - p31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 p60
육식은 본능이며,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원만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또한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을 (고기를 먹는) 세상사람들이 잡아 먹는다고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고기는 사회적으로 용인 되고 심지어 장려되기까지 하는 살상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을 지적할 경우에는 그는 사회적으로 추방되어 고립된다. 또한 육식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징그럽게 볼까봐 두려워하기에, 먼저 그들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저는 아직 진짜 채식주의자와 함께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어요. 내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징그럽게 생각할지도 모를 사람과 밥을 먹는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정신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다는 건, 어찌됐든 육식을 혐오한다는 거 아녜요? 안 그래요?"- p32
이렇듯 표면적인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조차 채식은 걱정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친밀한(정확히는 친밀하라고 강요하는) 가정 내에서 채식주의는 어떻게 인식될까? 이것은 걱정을 넘어 교정의 대상이 된다. 가정 내에서 영혜의 가족들은 자신의 남성성을 이용해, 혹은 가장의 지위를 이용해 고기를 억지로 먹이려고 한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간의 갈등에도 영혜는 고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강제로 영혜의 입을 벌려 고기를 넣으려고 하고, 영혜는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는것으로 저항한다. 이 갈등 구조는 단순히 육식과 채식의 구도로 이해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작가가 고의적으로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은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을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배치한 것으로 봤을 때 이는 남성 문화의 여성 저항으로 인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가정을 거부했으며 사회를 거부했다.
영혜의 채식의 시발점이 된 꿈은 이미지적 방식으로 제시된다. 고기를 먹기 위해 피를 뒤집어 쓴 영혜는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면서도 아니라며, 혼란스러워한다. 고기를 볼 때 자신이 아닌 채로 입맛을 다시는 영혜는 죄책감을 느낀다. 영혜는 이러한 서술 과정에서 가슴을 언급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p43
가슴은 여성성의 상징이었다. 육식을 위해 도살하고, 죽이는 것이 남성성이었다면, 여성성은 그것의 반대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위해를 가할 수 없다. 그것은 평화로운 것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영혜는 브레지어를 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여성성에 가까운 것을 가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여성성마저도, 고기를 먹지 않아 말라가며, 날카로워진다. 가슴은 결국 남성성 위에 올려진 여성성이었기에 남성의 사회 속에서 여성성의 상징으로 이해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의 결말 부분에 나오듯이 (남성과 여성 모두가 남성성 위에 서있기에, 인간성이 폭력성이라면) 영혜는 인간성을 포기한다. 영혜는 식물이 되기를 선택한다. 이는 "내 여자의 열매"와 비슷한 구도이며, 여기서 채식주의자가 "내 여자의 열매"의 연장선에 있는 소설임을 알 수 있다.
영혜의 육식에 대한 거부는 꿈이 계기가 된 것은 맞지만, 그것의 기원은 영혜의 어릴 적 진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혜를 문 개를 오토바이에 묶고 달리게 해서, 그래야 고기가 연해진다며, 강아지를 도축하는 어릴 적의 기억은 꿈의 원천이다.
"그날 저녁 우리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시장 골목의 알 만한 아저씨들이 다 모였어.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p53
자신을 문 강아지에 대한 복수로 마을 사람들은 잔치를 연다. 개에게 물린 상처는 개를 먹어야 낫는다는 주술적인 방식으로 영혜는 개를 처음 먹는다. 영혜는 이 과정을 통해 '사회화' 된다. 영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반복적으로 진술하면서, 자신 또한 이 사회의 일원임을 깨닫고,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죄책감은 영혜를 따라다니며 꿈으로 현현한다. 영혜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육식을 거부하여 가정과 사회의 구성원으로 벗어난다.
"저 여자가 왜 우는지 나는 몰라. 왜 내 얼굴을 삼킬 듯이 들여다보는지도 몰라. 왜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의 붕대를 쓰다듬는지도 몰라." -p60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p64
영혜는 어머니의 눈물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더이상 가정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육식을 그만두자, 남편은 그녀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영혜가 아니다. 그녀는 육식을 그만둠으로써 다시 태어났으며 구원받았다. 영혜는 사회에서 벗어나 오직 나무만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