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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 - [어제는 봄] 기억과 망각의 교차점

by 용집장 2020. 4. 29.

 '나'(정수진)를 외부에서 바라볼 때 그녀는 권태롭지만 평화로워 보인다. 남편의 끔찍한 가정폭력이나 엄청난 경제적 부채도 없이 그녀는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은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침체에 빠져있다. 수진에게는 목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언어는 10년간 쓰고 있는 소설이며, 트라우마이다. 소설이 아닌 것들은 수진에게 삶이 될 수 없다. 수진은 자신의 소설을 '아무도 읽지 않을' 소설이라 칭하며, 그럼에도 언젠가 읽힐 수도 있다는 '고문'을 당하면서 쓴다. 그런 고통 속에서 수진은 자신을 작가님이라 불러주는 유일한 사람, 이선우를 만난다.

 "이선우 경사는 마무리 인사로 이런 말을 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작가님.' 어떤 날은 이렇게 보냈다. '그럼 오늘도 좋은 글 쓰세요, 작가님.' 나는 이선우 경사가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를때마다 매번 놀랬다. 그것은 내가 등단 10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중략)… 내일은 경찰관한테 무슨 질문을 보낼까. 사거리에 서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좋은글 쓰세요, 작가님.' 그 말을 입으로 굴려보면서 휴대폰을 만졌다. - p18~20

 목소리가 없는 수진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을 써 외부에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수진은 10년 째 유령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녀에게 글을 청탁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주위 사람들은 수진이 등단한 작가인지도 모른다. 그런 수진에게 소설을 취재하기 위해 만난 경찰인 이선우의 작가님이라는 당연한 호칭에도 새로운 활기를 얻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멈춰 있는 수진의 내면은 이선우를 통해 작동하기 시작한다.

 "또한 나는 이선우의 스쳐 가는 표정 속에서 그에게 연락을 하는 것도 연락을 하지 않는 것도 모두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가는 경찰관한테 물을 게 많지만 경찰관은 자기한테 물을 게 없으니까. 경찰관이 작가한테 먼저 연락하는 건 -작가가 죄를 짓지 않는 이상-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갑자기 나타나 질문을 들이미는 것도 며칠 동안 아무 연락을 하지 않는 것도 모두 이선우가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 p48

 

 이선우는 정수진의 언어에 참여하는 유일한 존재이지만, 이선우는 정수진의 목소리를 찾는 과정에 수동적으로 참여한다. 여기서 수동적이라 하는 것은 이선우의 태도가 소극적이거나, 피상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를 찾는 과정의 주체는 그녀이며, 이선우는 그녀의 언어로 호명될때만 나타날 수 있다. 이선우는 정수진의 호명 없이는 그녀와의 접점에 닿을 수 없다.

              *

 수진은 경기도 경진시 은정동 해릉마을에 살고 있다. 그녀의 집은 야산으로도 이어져 있으며, 거기에는 '300여년 전 어떤 왕의 동생과 계비와 다음 왕이 되지 못한 아들'이 묻혀있다. 수진은 마을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능'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가 자살한 장소인 '야산', 엄마의 외도를 알게 된 '양주' 그리고 자신의 딸인 윤소은의 알 수 없는 트라우마적 장소인 '능'의 접점지이다. 그녀는 양주를 떠났음에도 양주에 살고 있다.

 그녀의 딸은 다섯 살 때 유치원 소풍으로 간 '능'에 바들바들 떨면서 땅에 발도 대지 않았다. 그날 밤 딸은 그녀에게 '검은 선'들로 가득 채운 그림을 보여주며 오늘 갔던 숲의 늑대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딸은 그 '검은 선'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들이 있듯이 망각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윤소은에게 '검은 선'들은 망각해야만 살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수진의 트라우마인 엄마의 외도는 망각할수도 기억할수도 없는 교차점에 있다. 외도를 알린 여자는 죽어서 없지만, 그 여자의 말은 생생하게 아직도 수진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외도를 목격하지 않았기에, 기억할 수 없지만, 그 여자의 말은 살아 움직이기에 망각할 수도 없다. 수진은 이를 선우에게 말함으로써 이선우를 자신의 내면에 참여시킨다. 이제 이선우는 정수진의 트라우마를 기억한다.

 "나는 저것이 나 때문에 나타났다고 확신하기 시작한다. 내 궁시렁거림이 주문이 되어 저것을 불러들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묻어둔 이야기 때문에, 내가 덮어둔 이야기 때문에, 나를 보러온 것이니까, 나만 모습을 드러내주면 아이들 쪽으로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가. …(중략)… 나는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본다. 늑대가 아니다. 돼지다. 검은 형체가 멧돼지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나는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이 이선우가 맞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중략)… 뺨에 총을 밀착시킨 채 다가오던 이선우의 눈빛이 흔들린다. 나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이제 너는 나를 쏘겠지" - p144~146

 '검은 선'들은 멧돼지가 되어 다시 정수진과 이선우, 윤소은의 앞에 등장한다. 윤소은의 학교에서 체험학습으로 간 숲에 멧돼지가 등장하고 정수진은 트라우마가 발현된다. 정수진은 이선우가 자신을 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수진이 결별을 고해서도, 이선우가 내리지 말라던 블라인드를 내려서가 아니다. 정수진은 저 멧돼지가 자신이 없어져야 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선우는 멧돼지를 쏘고, 정수진은 기절한다. 정수진의 묻어둔 이야기 때문에 등장한 멧돼지는 정수진이 사라지지 않아도, 사라졌다. 정수진의 트라우마는 극복되었으며, 목소리는 되찾았다. 이제 그녀는 누가 자신의 소설을 읽어주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의 목소리로 읽을 것이다.

 "나를 극복하고 너에게 가는 길은 이렇게나 멀어서, 나는 여전히 매일매일 1층으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유리문 너머로, 니가 나를 기다리던 곳으로, 힘을 다해 달려 나간다." - p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