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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세계와 인간성

용집장 2020. 4. 29. 21:56

 

한강 작품들은 [채식주의자] 와 [소년이 온다]를 양축으로 에코페미니즘과 현상학적 신체와 관련된 것으로 연구되어 왔다. 이러한 연구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작품들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봤을 때, 이것은 비약은 아닐지언정, 한강의 글을 조각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피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한강은 작품 초기부터 끊임없이, 그러나 조용히 인간성에 관해 질문해 왔다. 인터뷰에서(http://ch.yes24.com/article/view/30861) 볼 수 있듯 한강은 자신의 작품들을 이념이 아닌 질문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한강은 끊임없이 질문해 왔고, 하이데거의 말처럼 질문 자체로 한강은 끊임없이 변화해 나가면서 답을 찾아나가고 있다. 한강은 삶과 인간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강과 같이 한강이 물어본 질문들에 사유함으로써 대답하고, 질문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토록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껴안을 수 있는가' - [채식주의자]

'삶을 살아내야 하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 [바람이 분다, 가라]

'삶을 살아내야만 한다면 인간의 어떤 지점을 바라볼 때 그것이 가능한가' - [희랍어시간]

'내가 정말 인간을 믿는가. 이미 나는 인간을 믿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인간을 믿겠다고 하는 것일까' - [소년이 온다]

검은사슴(1998)부터 흰(2016) 까지 한강은 어둠과 밝음, 삶과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 왔다. 검은 사슴과 여수의 사랑(1995)에서 세계는 우울하고 비참하며 남루하다. 작품에서 나오는 세계는 '술과 주먹질'의 세계이며, 환멸의 세계이다. 그러나 한강은 이런 세계를 밝고 평화로운 세계와 대립시키지 않는다. 세계는 폭력과 아름다움, 깨끗함과 더러움이 한 데 모여 섞여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것과 같은 이치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우리의 삶은 '술과 주먹질'의 세계임과 동시에, '따뜻함과 선의'의 세계이다.

'그때 왜 우리는 하필 백목련을 골랐을까, 흰 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 - 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 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흰] - p79 

세계가 이토록 선과 악으로 섞여 있다면 인간의 삶 또한 선과 악으로 뒤섞여 있지 않을까. 인간의 가장 깊은 어둠에 끔찍한 모습을 한 인간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 또한 인간이기에 품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혹은 그것을 외면해야만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의 생존은 기본적으로 인간 이외의 것들을 탄압하고, 경멸해야 하기에, 우리가 말하는 인간적인 것들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임을 포기해야 한다. 이러한 모순적인 인간이해는 내 여자의 열매(2000)와 그의 연작 채식주의자(2005)에서 '식물되기'를 통해 표현되지만 검은 사슴에서도 그 전조는 등장한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내가 묻자 의선은 다소 곤혹스러운 얼굴로 긴 대답을 했었다. 그냥 …… 소나 돼지나 닭이나, 어떤 짐승이 죽어야 내가 그 살을 먹는 거잖아요? 결국 그 짐승이 죽는 대가로 내가 조금 더 건강해진다는 건데 …… 아무래도 나 자신이 그 짐승보다 낫다고 여겨지지 않아요. 소가 엄마 소한테서 떨어질 때 얼마나 슬프게 우는 줄 알아요? 돼지가 죽기 전에 얼마나 불쌍하게 비명을 질러대는데요. 방정맞은 생각이지만, 나는 회식 같은 데 가서 고기를 굽고 있으면 자꾸만 상상을 하게 돼요. 저것이 살았을 때는 어땠을까, 죽는 순간은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내가 그 짐승의 살을 먹고, 그 짐승보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검은 사슴] -p328

이러한 [검은사슴]의 질문은 내 여자의 열매의 아내와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이어받는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면서, 다른 것을 파괴하지 않고 순수한 인간성을 보존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관념적인 해석에 불과하며, 실재의 삶에서 영혜는 그저 영양실조에 걸려 정신 병동에 누워 생을 마감한다. '어둡고 끈질긴 눈빛'만을 남기면서. 질문은 언제나 남겨진 사람 것이기에, 채식주의자에서의 질문은 인혜가 다시 이어받는다. 인혜는 영혜에게 끊임없이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녀 또한 마찬가지로 죽지 못해 살아남은 것이다. 인혜는 자연에게 죽음을 거부당했고 그것의 진술 부분은 일종의 종교적인 교리로마저 느껴진다. 죽음이 교리로 거부당했다면,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하나이다. 어떻게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다시 [바람이 분다 가라]와 [희랍어시간]을 통해 물으며, [소년이 온다]에서 이 질문은 피 흘리며 변주한다.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믿을 수 있는가’

80년 5월의 광주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 넣을 수 있는 탄환을 지급' 하고,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 다며 타인에게 '악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기억들'을 자행한다. 인간 스스로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라고 자백하게 하며, 우리가 고결하다고 믿는 인간적인 것들은 허상이라고 말한다. 80년 5월 광주에서 모든 고결한 인간적인 것들은 패잔병처럼 고개 숙이고 있다. 그들은 패배했다. 그러나 언제나 한강처럼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소년이 온다] - p116

인간은 '양심'이라는 고결한 인간성으로, 인간의 끔찍한 얼굴을 마주 보고, 투쟁한다. 인간들은 그들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며, 그들에게 억압당하지만, 그들에게 동화되지 않는다. 그들이 동화되는 것은 오직 '소년'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몸뚱어리'가 아닌 '소년'의 영혼이며, 영혼은 그들과 끝까지 함께한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를 통해 그들은 무한으로 간다. 인간의 얼굴을 마주 보고 투쟁하고, 억압당하는 이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들은 소년이 '꽃 핀 쪽으로' 가게 인도할 것이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2015)과 [흰](2016)은 제목으로만 보자면, 한강이 희고 깨끗한 것에 대해 쓰고 싶어 했던 의도와 부합한다. 그러나 한강이 쓴 [흰]은 그렇지 않다. [흰]은 권희철 문학평론가가 쓴 해설의 말대로 하이데거와 칸딘스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강의 [흰]은 다른 색채들과 동일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색깔을 가능하게 하는 먼저 개방된 존재이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흰 것은 다른 색채를 존재하게 하기 위한 일차적인 조건이다. 흰 것이 없다면 그 어떤 색깔도 없다. 그 어떤 색깔도 흰색으로 다시 덮을 수 있다. 우리의 상처를 흰 거즈로 덮어 우리는 나아간다. 그러나 흰 것은 상처만 덮지 않는다. 과거의 영광도, 아름다운 그림도 흰 것으로 덮을 수 있다. 우리는 그렇기에 [흰] 이 선의와 깨끗함만을 바라보는 소설이 아님을 깨닫는다. [흰] 것들은 깨끗하지만 잡(雜) 하고 (p170) 새롭지만 영원하지 않다. 그렇기에 한강은 이렇게 쓴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흰] p64

흰 것이 세계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기에, 흰 것은 모든 들끓는 것들을 품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깨끗할 수 없다. 필연적으로 흰 것은 깨끗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결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소년이 온다]에서 물었던 어떻게 인간과 싸우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한강은 대답해주지 않고 [흰]에서 다시 묻는다. 인간은 어디서 만나는 가. 우리가 시간 속에서 만난다면, 다른 시간 속에서 만난 [흰] 것들은 어떻게 내 앞에 있는 것인가.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에서도 '우리는 시간 밖에 있' 다고 진술하며, 시간성이 어떻게 인간성과 만나는 가에 대해 한강은 진술한다. 한강의 혼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인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에서 등장한 '시간' 개념은 이후 한강이 쓸 삶과 세계, 인간에 대한 증언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 권희철 문학평론가가 쓴 하이데거와 칸딘스키의 철학적 시간 및 색채 개념에 깊이 동감하면서도, 베르크손과 한강의 매개점을 서술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강은 시간뿐만 아니라 기억에서도 깊은 성찰을 보이는데, 기억과 시간은 베르크손과 한강 양자가 공유하는 인간성의 핵심이다. 한강의 작품 연구가 현상학적 신체론, 혹은 현상학적 시간론이 아닌, 한국의 生철학 문학작품 연구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흰] - p81